Agio Journal

어느 선생이 한여름에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

이계존 / 교수 / 날짜: 2019.8.1. / 조회: 567

어느 선생이  한여름에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
- 애정과 지식을 버무려 후학을 길러내는 수원여대 사회복지학과 이계존 교수

아지오저널 8월호는 이계존 교수가 직접 글로 써 내려간 삶의 이야기와 장애인 사랑 그리고 아지오에 바라는 마음을 함축해보기로 한다.

빈한한 아침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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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새벽에 일어나서 하루를 일찍 준비한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나의 습관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시작되었다. 
  장사 채비를 위해 새벽녘 집을 나서는 아버지를 마중해야 한다는 어줍지 않은 장남의 의무감에서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일찍 일어나 마땅히 할 일이 없었기에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시아방송이나 극동방송을 듣곤 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심심하면 괜히 성경책을 뒤지고 교과서 등을 훑어보기도 했다. 종내 이마저도 싫증이 나면 이런저런 쓸데 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대학시절에도 만원버스는 너무 싫었다. 러시아워의 막히는 길, 사시사철 만원 버스에서 흘리는 땀, 이성과 밀착된 상황에서의 극도의 신경 씀 또는 자리를 두고 벌이는 날카로운 신경전 등등.
난 아침 버스에서 이미 그날의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리곤 했었다. 그리하여 난 이른 새벽에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새벽 공기를 가르는 한적한 버스에서 '삼중당' 문고를 읽는 호사스런 여유를 가지며 등교하곤 했었다. 
요즘에도 가능하면 새벽에 일어나 이른 출근을 한다. 뻥 뚫린 도로와 새벽의 상쾌함 그리고 여유 있게 시작하는 하루.
이른 시간 도착한 학교에서 한적한 교정도 둘러보고 또 연구실에 앉아 그 누구, 그 무엇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고 보고 싶은 책을 훑어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생각도 하며 이른 아침 나만의 여유를 즐긴다.
  누군가 수 많은 재산을 아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고 그나마도 더 큰 것을 주기 위해 편법 증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아들에게 남겨줄 재산은 무엇일까. 솔직히 부채나 떠넘기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다. 
하지만 아들에게 뭔가를 남겨주고 싶은 것이 가진 것 없는 이 애비의 간절한 바램이다. 그리하여 난 아들에게 여유있는 아침을 남겨주고자 한다. 내 아버지가 내게 그랬듯이 '새벽녘에 일어나 시작하는 여유 있는 하루'를 아들에게 물려주고자 한다.
지난 여름, 난 아들에게 한 가지의 과제를 요구했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이 아들놈 얼마간 잘 지키는 듯 하더니 요즘은 약간 해이해진 듯 하다. 그러나 분명 이 애비의 서글픈 유산을 소중히 지켜나가리라 믿는다.
성인은 자신을 위해 쌓아두는 법이 없다(聖人不積, 노자 '도덕경'에서). 나의 황당한 합리화여!


이계존의 대학시절: 내안의 큰 스승, K교수님을 그리며
  1980년대 초반, 대학생으로 살아가기가 무척 힘들었다. 당시 야만성에 근거한 집권세력에 대해 분노했었다. 하지만 서슬 퍼런 정권의 폭압에 대항하여 감히 나서지는 못하였다. 그저 속앓이만 했을 뿐이었다. 
반면 자신의 입신영달은 멀리하고 야만적 정권에 감히 대항하는 일부 학우들도 있었다. 이들을 보면서 난 나의 비겁함을 마냥 부끄러워했었다. 그리고 하릴없이 술집으로 향했다. 비겁함을 감추고자 하는 술로 인한 비틀거림을 교묘하게 명정(酩酊)이라 합리화하는 등, 내 학부 시절은 그다지 바람직하지만은 않았었다. 
그렇지만 학부 지도교수였던 김종옥 교수님(1928~2007)은, 늘 나를 ‘우리 계존이’라 칭하며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셨다. 하루는 낮술에 취해 오후 수업에 들어온 나를 ‘우리 계존이, 어제 먹은 술이 아직도 깨질 않았구나.’ 하며 감싸주시기도 했었다.
학부 졸업을 앞두고 교수님께 인사를 갔었다. 반갑게 맞이하면서 교수님은 “그래, 우리 이 선생, 졸업을 축하한다.”고 말씀하셨다. 늘 ‘계존아! 계존아!’ 하시던 교수님이 갑작스레 나를 ‘이 선생’ 이라 칭하셨던 것이다. 다소 당황해하던 내게 교수님은 짧지만 아직도 부담이 되는 강의를 해주셨다. “이제까지 넌 내 제자였기에 ‘계존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제 너도 사회복지 전문가로서 출발하기에 당당한 나의 동료이며, 쉽지 않은 사회복지 업무를 같이 수행해야 하는 든든한 동료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부터 너를 ‘이 선생’ 이라 칭하겠다.”
방황만 가득했던 나의 대학시절, 그럼에도 졸업과 동시에 날 든든한 동료로서 인정하시던 교수님의 모습은, 졸업한 지 이십 수년이 흐른 지금도 또렷이 기억된다. 돌이켜보면 교수님은 결코 학교라는 공간에서 학업에 전념하지 않았던 나와 같은 학생들을 평가 절하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면서 그 이면의 전혀 구체화되지 못한 각자의 가능성에 주목하시고 모두에게 두루 따듯함을 보여주셨던 것이었다.
  차분한 마음을 얻고자 즐겨보는 이철수선생의 판화 중 유난히 내 시선을 끄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다소 성의가 없을 법도 한 단출한 줄기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논에서 잡초를 뽑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벼와 한 논에 살게 된 것을 이유로
‘잡(雜)’이라 부르기는 미안하다.”

  우리 모두는 각자 충분히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러나 논이라 임의 규정된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 일부가 그저 ‘잡’ 이라 칭해지고 마침내 솎아지는 것은 분명한 야만이다. 보다 많은 소출을 얻고자 하는 욕심이 일견 이해도 된다. 그러나 논에 있다는 이유에서 스스로의 아름다움에도 부질없이 솎아져 버려지는 잡(雜)들의 아픔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선생으로서 나는 늘 하나의 다짐을 한다. 학교 또는 교실이라는 공간 규정에 천착하여 너무도 아름다운 제자들을 고루한 하나의 틀로 재단하고, 이따금 그 틀에서 어그러질 때 몰인정하게 솎아 버려지는 야만 그리고 그 야만으로 인한 누군가의 아픔이, 우리 교육공간에서는 없어야 함을.
  내 다짐의 이면에 큰 스승으로 김종옥 교수님이 늘 자리하기에 난 또 한 명의 김종옥 교수이기를 갈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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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불출 이계존: 바위 같은 년
  참석하기 곤혹스런 교내 행사의 하나가 사은회다. 그 동안 별로 가르친 것도 없이  제자들을 척박한 실무 현장으로만 내모는 것 같다. 한켠 미안하고, 한켠 안쓰럽다. 그래서 사은회에 오라는 제자들의 초청에 난 '안 갈거다'라고 외치곤 한다.  
여지없이 금년 사은회에도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저런 절차가 진행되고 사회자가 마련한 여흥은 요즘 유행한다는 다섯 단어로 묻고 다섯 단어로 답하기였다. 사회자가 질문하고 이에 교수가 답하는 형식이었다. 
별스런 질문과 기상천외의 답변이 오고갔다. 그러다 내 차례가 되었다. 질문은 ‘사모님자랑’ 이었다. 이게 왠 뜬금없는 질문인지. 이런저런 말을 만들며 손가락으로 그 수를 꼽아보았다. 사회를 보던 친구가 굳이 다섯 글자가 아니어도 되니 사모님 자랑을 하라고 했다. 
마누라 자랑, 화려한 것도 내세울 것도 없다. 그러나 그 든든함은 내게 큰 힘이 된다. 마치 청마 유치환의 시 마냥 '두 쪽으로 깨뜨려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 와 같다.  
이런 팔불출의 자랑을 하고 난 후 난 다섯 글자로 마무리를 해야 했다. 바위같은, 네 글자까지 얘기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 '바위 같은 년'.
나중에 생각해 보니 '바위같은 처(妻)' 등 근사한 마무리 말이 있으련만 그때는 '년'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바위 같은 년, 마누라는 내 이런 얘기를 듣고도 꿈쩍하지 않는다. 진짜 바위 같은 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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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에서 진 빚, 이후 갚아야 할 빚
  곱창볶음을 먹고자 마누라와 함께 수원 지동시장을 갔다. 올망졸망 모여 있는 곱창 가게들이 정겨웠다. 모든 집이 비슷하련만 상호가 눈에 익은 한 집을 택해 자리를 잡았다. 곱창볶음과 소주를 시켰다. 그리고 무던하게 곱창 끓기를 기다렸다. 한잔 술에 어울릴 안주가 마련되기를.그저 철판만 지켜보고 있는데, 한 노부부가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등산 후 저녁을 먹으러 왔는지 노부부도 국밥과 역시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시장통의 투박한 집이기에 모든 식탁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보글보글 끓고 있던 우리의 볶음이 다소 요란하다고 생각하던 찰나, 옆자리의 할아버지가 한마디를 했다. “곱창은 당신들이 먹는데 철판이 우리 쪽에 가까워서 국물이 튈까 염려된다.”다소 시비조의 내용이었지만 할아버지의 표정은 연신 익살스러웠다. 철판의 위치를 옮기려던 나를 제지하며 할아버지는 “괜한 소리를 했다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고. 잠시 동안 옆자리와 서먹한 가운데 왕후의 소주 그리고 시장통의 곱창으로 우리 부부의 만찬이 마련되었는데, 마누라는 곱창 볶음을 자그마한 앞 접시에 담아 옆자리 노부부에게 건네면서 한 마디, “어르신! 양은 많지 않지만 안주 삼아 드시라”고. 마누라의 호의는 이내 한잔 술로 화답 되었다. 할아버지 왈(曰), “국밥을 나눠줄 수는 없고, 소주 한 잔 주겠다.”며. 또 한 잔 술을 받은 나는“그냥 말 수 없다”며 할아버지에게 다시 한 잔을 드렸고. 그렇게 노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며 때로는 각기 서로의 얘기에 집중하며 시장통에서의 우연한 한잔을 즐겼다.술이 모자랐기에 할아버지와 나는 각기 아내의 도끼 눈, 그 눈치를 봐가며 한 병씩을 더 시켰다. 그리고 그마저도 바닥을 보이자 먼저 할아버지가 또 다시 한 병을 호기롭게 추가하려는 순간, 할머니가 끝내 자리를 박차고 나가셨다. 다소 삐친 할머니의 모습에 할아버지는 별수 없이 우리와 작별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잠시 후 할머니가 우리 자리에 오더니 한마디를 건네셨다.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그리고 “두 테이블의 술값 모두 계산했다.”고. 난 놀라며 즉시 노부부를 따라 갔다. “만일 계산을 한다면 우리가 해야지, 이건 아니다”라며. 한데 할아버지가 한마디를 하셨다. “우연히 만난 옆자리의 젊은 친구에게 한잔을 사는 즐거움이 있다”고. 그리고 “만일 이것이 부담된다면 오늘의 채무를 더 젊은 누군가에게 이후 갚으라.”고. 노부부의 호의를 통해 공짜 술의 진미를 맛보았으며, 특히 우리 사회에 팽배한 세대 간의 불편이 일순 해소됨을 느꼈다. 할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이번 주말 ‘지동시장 곱창집’으로 가서 젊은 누군가에게 ‘빤한 수작’을 하고 이후 ‘정겨운 한잔’ 을 편하게 마시고 ‘그 술값’ 을 대신 내줘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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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마술단 몰락사(沒落史)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장애에 대한 여전한 편견이 있다. 그 연원은 어찌 보면 어린 시절부터 장애인과의 교류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여 장애인복지 전공자로서 나는 장애에 대한 올바른 인식 형성에 기여해야 하고, 그 하나의 전략으로서 자연스레 장애인과 아이들이 교류하고 소통하는 장을 마련해 줘야만 한다. 
오래전부터 장애인과 아이들이 함께하는 장으로서 마술을 생각했다. 장애인이 마술공연을 하고 아이들이 이 공연을 본다면 마치 ‘마술’ 처럼 편견은 없어질 거라 기대하면서. 그리하여 몇 해 전 지적장애 십여 명 그리고 시각장애 한 명을 선발해서 마술교육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사실 마술이란 어찌 보면 교묘한 눈속임일 수도 있다. 한데 지능이 다소 모자라는 지적장애인 그리고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마술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행했었다. 
힘들어하는 장애 친구들을 도닥거리며 몇 달 동안 마술교육을 계속했다. 마술사로서 현란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저 서툰 마술일지언정 이를 매개로 아이들과 교류하고자 하는 것이 우선되는 목적이었다. 
힘든 교육 끝에 마침내 장애인 마술단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성남의 한 어린이집, 십 수 명의 아이들을 앞에 두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당일 올려진 마술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들이었다.
  한참 공연이 진행되고 있는데 한 아이의 지적이 있었다. “나 저거 알아. 어디로 넘기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그놈이 눈속임의 비밀을 까발린 것이었다. 고약한 스포일러였다. 공연하던 지적장애 마술사가 갑자기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나치게 긴장했던 친구였는데 스포일러의 개구진 한마디에 완전히 마비가 되었다. 주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공연을 마치고 그 친구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후 후속 공연을 못할 정도로 마술단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단장으로서 내 고민이 시작되었다. 스포일러를 방지하며 아이들이 순진하게 마술세계로 빠져드는 전략을 찾아야 했다. 한데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더 나이가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하면 될 것이었다. 이렇게 얄팍한 계략으로 이후 공연이 기획되었다. 
한층 더 어린 관객들은 순진하게도 마술사의 눈속임에 충분히 현혹되었다. 그리고 공연 마술에 대해 그저 감탄사만을 연발했다. 성공적으로 공연이 종료되었다. 초연에서 긴장하고 눈물을 쏟았던 그 친구까지 모두의 입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모두가 고무된 상태로 마술 도구 등을 정리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다가왔다. 그리고 방금 전 공연을 마친 시각장애 마술사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한마디, “아저씨 나 보이지 않지. 나랑 악수하자, 악수를 하면 친구가 된다.” 천진한 한 아이의 성원에 장애인 마술단 단장으로서 내 보람이 매듭 되었다.
  이후 난 장애인 마술단을 계속하기 위해 후원처를 개발하고자 했다. 중앙부처, 경기도 그리고 전문기관 등에 그동안의 성과를 이야기하며 지원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장애인마술, 시작은 했지만 종내 계속하지 못한 나의 끈기 없음에 그저 아쉬웠던 하나의 기억으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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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모 방송국 예능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한데 너무도 익숙한 한 친구가 마술을 공연하고 있었다. 가장 초보의 마술이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기에 지켜보는 사람의 탄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공연 이후 진행자가 물었다. “마술은 어디서 배웠냐?”고. 그는“오래전 한 기관에서 장애인 대상의 마술교육이 있었는데 그때 배웠다.”고 답했다. 그는 내가 단장이던 그 마술단의 단원이었다. 그리고 한 아이와 친구가 되자며 악수를 나누었던 바로 그 시각장애 마술사였다.

방송에서는 그의 바람도 소개되었다.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 마술사로서 마술을 계속하겠다. 그리고 신체 분리의 마술을 배우고 싶다.” 마침 패널로 출연한 유명 마술사가 멘토로 마술을 가르쳐 주기로 약속했다.

내가 시작했던 그 일, 주변의 지원이 없어 중단했던 그 일, 그 일을 나의 클라이언트였던 친구가 외로이 계속하고 있었다. 든든한 친구다. 고맙다.

우리나라 장애인복지의 든든한 뿌리
  “장애아는 사회에서 격리시켜라(플라톤)”, “장애아를 양육하지 못하도록 법을 제정하라(아리스토텔레스)” 등 장애인에 대한 비인격적 인식과 가혹한 처우는, 놀랍게도 서양 철학의 초석을 다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주장이었다. 이와 같은 장애인관은 중세에 최악의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장애인을 ‘신에게서 벌을 받은 사람’ 또는 ‘자신들과는 다른 신을 섬기는 괴물’로 규정하여 비장애인과 엄격하게 분별하였다. 심지어 장애인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지르면서 “너희가 모시는 신이 있다면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대심판의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장애를 질병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등 체계적인 장애 개념을 구축하여 왔다. 즉, 위독한 질병을 ‘독질(篤疾)’, 몸에 남은 질병을 ‘잔질(殘疾)’ 그리고 고칠 수 없는 질병을 ‘폐질(廢疾)’로 구분하였다. 또한 이러한 구분하에 각각 상태에 따른 치료 및 복지 시책을 제공하였다. 
조선시대 시행된 대표적인 장애인 대상의 복지 시책은 다음과 같다. ① 장애인 및 그의 가족에게 각종 부역과 잡역의 면제, ② 장애인 학대나 살해의 경우 가중 처벌, 또한 이러한 경우 해당 고을의 읍호 강등 등 집단 책임 강조, ③ 점복, 독경, 악공 등 잔존능력을 고려하여 관직 등의 일자리 창출, ④ 명통시(明通寺) 등 장애인단체 운영 및 지원.
  서양의 경우 장애인을 보는 초기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인권과 복지에 대한 의식의 진전 그리고 전쟁이나 산업재해 등을 통해 양산된 다수 장애인에게 보상적 차원에서 다양한 정책이 확대되면서 장애인복지가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왔다.
  반면 우리나라는 장애인 인권 존중 및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혜택 등의 전통적 기반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되었고,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목표 달성과 속도만을 중시한 결과 대부분 상실되었다. 돌이켜 ‘뒤’를 보는 역사의식, 그리고 따듯한 시선으로 ‘옆’을 보는 연대ㆍ복지의식 등이 결여된 채, 그저 ‘앞’만을 편향적으로 바라보는 압축성장기를 거치면서 장애인은 점차 소외되고 소극적 존재로 전락하여 왔다.
  무조건 외국의 제도만을 쫓지 말고, 우리 안에 있었던 든든한 뿌리를 다시금 확인하고, 이제라도 되살리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유대표 그리고 아지오에 대한 기대
  유석영대표가 아지오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친구로서 난 반대를 했었다.
  반대의 변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대통령의 구두에 대한 언론 보도 등으로 상당 관심이 일었지만 그 지속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라는 것. 중국산 중저가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시장에서 다소 고가인 수제 구두의 수요는 제한적이라는 것. 그리고 다양한 신발을 착용한다는 요즘의 소비 형태를 고려할 때 고급 신사화나 숙녀화의 재구매 주기가 매우 길다는 것 등등. 
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 대표는 고집스레 아지오를 다시 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열심히 뛰고 있다. 그러기에 친구로서 난 누구나 할 수 있는 반대 그리고 부정적 전망보다는 그에게 또 아지오에 대해 이런 흐뭇한 기대를 하게 되었다. 
아지오가 직접 구매 예상자에게 마케팅을 할 수 있다. 누군가 제3자가 아지오의 탁월함을 PR할 수도 있다. 또는 지속적으로 아지오의 구매를 매체를 통해 광고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기대하는 것은 이러한 마케팅도, PR도, 광고도 아니다. 바로 브랜드로서 아지오의 정립이다.
없어서 사는 것이 아니다. 떨어지고 헤져서 사는 것도 아니다. 또 다른 제품보다 더 좋아보여서 사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사는 것이다.  그냥 아지오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자존감을 가지게 되는 브랜드의 경지이다.
  브랜드로서 이지오의 정립은 분명 어려운 과업이다. 그러나 내 친구 유대표 그리고 자신의 일에 몰입하는 아지오의 식구들이 있기에 반드시 달성될 과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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