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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Agio
아지오를 소개합니다.
Agio Journal
아지오를 신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바다와 사람이 아름다운 여수에서...
바다와 사람이 아름다운 여수에서...아지오 조합원, 송정인더스트리 김영화 원장과의 겨울 데이트 나폴리가 더 아름답다구요? 버스커 버스커 장범준은 '여수 밤바다' 노래로 여수를 쓰다듬었다. 가사에 풍광을 조목조목 담지는 않았어도 사람들은 이미 그 곡조에 이끌려 여수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그려 넣는다. 해안을 따라 이어진 곡선은 이탈리아 나폴리의 단조로운 모습에 비교하기 싫을 만큼 매혹적이며 오동도, 향일암, 진남관 등을 포함하는 여수 10미(味) 10경(景)은 돌산 갓김치와 함께 우리나라의 귀한 문화적 자산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왜 버스커 버스커는 해 있을 때에도 아름다운 여수를 밤바다만 걷고 싶다고 말했는지 궁금하다.옥빛 바다 위에 점점이 떠있는 365개의 섬은 카메라로 표현하기에는 많이 부족하고 영취산 진달래와 검은 모래로 유명한 만성리 해수욕장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망치와 정으로 뚫어낸 마래터널은 나폴리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비경이다. 아마도 버스커 버스커는 돌산대교 위에서 지독스럽게 아름다운 야경에 빠져 여수를 온통 밤바다로 노래하지 않았나 여겨진다.거북선의 고향 여수에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다. 여기서 일일이 다 말하기에는 벅차서 딱 두 사람만 소개한다. 그 한 사람은 아지오라면 죽고 못 사는 여수종교문제연구소 신외식 소장이다. 구두만드는풍경의 소소한 일상에도 늘 SNS로 반응을 하면서 사방에 아지오 자랑을 늘어놓느라 여념이 없다. 언제라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여수에서 아지오를 홍보 판매하자며 우리에게 힘을 많이 보태 주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또 한 사람은 오늘의 주인공으로, 장애인들과 함께 사무용품과 격조 높은 커튼을 제작하여 신바람을 불러일으키며 비즈니스에 열정을 쏟는 송정인더스트리의 김영화 원장이다. 사회적협동조합 구두만드는풍경 조합원 중 가장 먼 곳에 사는 사람으로 28년 동안 장애인들과 고락을 함께 해온 사회복지사이다. 김원장 이야기는 한 걸음 더 들어가 하기로 하고...누가 여수항을 동양의 나폴리라 했는지 그 진실이 알고 싶다. 한려수도와 다도해 해상공원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나폴리를 '유럽의 여수항'이라 해야 할 말을 여수항을 동양의 나폴리로 잘못 표현한 것 같다. 지금이라도 사실을 바르게 일깨워 '여수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나폴리 시장에게 전해주었으면 한다. ​아름다운 여수장애인들과의 특별한 인연 김영화 원장은 여수에서 나고 자란 여수 사람이다. 부유하지 않은 가정의 8남매 중 넷째였지만 위로 누나 셋이 있어 장남이었다. 열두 살 많은 큰 누나가 어릴 적 높은데서 떨어져 뇌전증을 가진 장애인으로 집에서 보호를 받았고 김원장 역시 예비고사를 20일 앞두고 뜻하지 않은 중병을 얻어 상당한 시간 집에서 요양을 해야 했었다. 김원장의 어릴 적 꿈은 목사였다. 30대 초반 어느 정도 병을 치료한 후 신학대학원 입학시험을 준비하며 짬짬이 광주 무진복지관에서 자원봉사를 했는데 당시 복지관장이 "목회 활동은 당신과 맞지 않으니 여수로 돌아가 장애인시설에서 일을 하면 잘 맞을 거 같다." 하여 그 길로 고향 여수로 돌아와 지금의 동백원에서 장애인들과의 삶을 시작했다. 월 43만원 박봉에 일은 많았지만 장애인들이 정말 순수했고 함께 근무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무려 30년 가까운 세월을 보람과 자부심을 가지고 복지현장을 지켜 왔다. 지금까지 알콩달콩 가정을 꾸려온 아내도 같은 곳에서 일하는 동료였다. 누나의 장애를 보며 자라온 김원장이 목회자가 아닌 사회복지사로 소명을 다할 수 있었던 점은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특별한 인연들이 선하게 이어진 결과로 보여진다."저에게는 딸이 셋 있는데 가능하면 자유로운 직업을 선택하라고 주문합니다. 치열하게 경쟁하거나 직업의 노예가 되지 말고 즐기며 여유를 통해 행복을 누리라고 얘기합니다."욕심보다는 가치를, 경쟁보다는 나눔을 중시 여기는 김원장에게서 사회복지사의 내음이 물씬 풍긴다. 1959년생 김영화 원장은 따뜻한 가슴으로 장애인복지현장을 지켜온 까닭에 본인 스스로는 물론 구순의 어머니에서부터 세 자녀에 이르기까지 충분하게 복을 누리는 가정으로 느껴져 참 좋아 보였다.  복사용지 제조현장을 둘러보는 김영화 원장비즈니스가 진정한 장애인복지라고 주장하는 김영화 원장 송정인더스트리는 장애인직업재활시설이다. 노동시장에서 경쟁이 불리한 장애인들이 이 곳에 취업하여 정규직으로 일하거나 훈련생으로 참여하는 근로사업장이다. 지원부서 직원들을 합하여 총 50명이 일하는 중소기업이다. 연간 매출액은 20억 정도, 생산 제품은 사무용 복사용지와 문서보관함이 주된 품목이며 블라인드와 커튼도 오랫동안 생산하고 있다. 이렇게 왕성하게 사업을 하는 중소기업을 보건복지부는 장애인직업재활시설이라 정하여 부르라고 한다. 하지만 김원장은 '송정인더스트리'라는 이름에 맞게 기업 또는 산업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근로장애인이 아니라 사원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틀에 박힌 보호의 개념을 벗어나서 노동의 주체로 장애인의 신분을 인정해야 한다는 그 주장에 우리 아지오도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2014년 3월부터 3년간 김원장은 한국장애인직업재활시설협회장을 맡아 줄곧 이 같은 주장을 펼쳐 왔다. 장애인직업재활시설이 비즈니스모델로 변화하여 전도가 유망한 기업으로 우뚝 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과 의지를 입증해주듯 사원들의 손놀림과 기계들이 회전하며 내는 소리가 큼직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송정인더스트리 김영화 원장과 함께아지오를 향한 김원장의 잔소리 "모든 국민들이 아지오를 잘 알고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벗어나세요. 대통령의 구두이며 모델들이 유명해서 잘 팔릴 거라는 생각은 버리세요. 날마다 무차별적으로 홍보하며 발이 닳도록 뛰어 다녀야 합니다."평소 길이 멀다는 이유로 총회에 자주 빠지는 조합원이라서 한껏 핀잔을 주려 했는데 오히려 쓰디쓴 충고를 듬뿍 받았다. 충고라기 보다는 김원장이 아지오에 대한 애정지수가 높아 대놓고 약이 되는 조언을 준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돈을 많이 써서라도 홍보에 집중하라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떠한 이슈나 이벤트가 있을 때 잠깐 기억했던 일들이 조금 시간이 흐르면 금세 잊혀지기 십상이라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한 현상으로 아지오가 잊혀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김원장이 느슨해진 구두만드는풍경 심장부에 강한 어조로 자극을 준 것이다. 먼 길 달려와 야단 섞인 선물을 받으니 씁쓸하기도 했지만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저도 아지오의 발전을 위해 여수지역에 열심히 판매망을 펼치겠습니다. 봄 되면 장터를 마련해서 소비자들을 모으겠습니다."사회적협동조합으로 출발한 아지오 시즌2가 김영화 원장처럼 든든한 조합원이 있어 그 미래가 한층 더 밝다. 더군다나 아름다운 여수 사람들이 격조 높은 아지오를 신고 오동도와 밤바다를 걷는다면 연인들의 사랑, 친구들의 우정, 발이 건강한 여수 어르신이라는 소문이 글로벌하게 퍼져 나가리라 믿는다.겨울에도 포근한 여수에서 아지오의 2019년을 가다듬으며 다가오는 2020년 새해에 일어날 대박의 향연을 김영화 조합원과 함께 스케치해 본다.​ 
김영화 / 송정인더스트리 원장 / 2019.12.10.
젊은 박사가 사회적경제를 일구어 간다.
젊은 박사가 사회적경제를 일구어 간다- 국립 경남과학기술대학 이은선 교수와의 가을 데이트 -진주에서 온 특별한 손님 목련꽃 하얀 송이가 하나 둘 봄 속에서 피어나던 날에 우리 회사로 고운 손님이 찾아 왔다. 젊은 여성이 다 늦은 저녁에 멀리 진주에서 구두를 맞추기 위해 귀한 손님으로 온 것이다.  "저는 특별한 구두를 주문하고 싶어서 이곳을 찾아 왔습니다. 남성들이 신는 정장 구두를 만들어 주세요."라는 것이었다. 아담한 체형에 발 길이도 작은 편에 속하는 여성이 남성용 정장 구두를 주문하여 우리는 조금 의아했다. 보통의 여성들이 가능하면 신발이 커 보이는 걸 꺼려하는데 무슨 이유로 남성화를 원하는지 사뭇 궁금했다. 군인도 아니고 격한 운동을 하는 스포츠 선수도 아닌데... “손님은 발이 작아 남성 구두를 맞추기 쉽지 않습니다. 남성화의 창은 길이와 넓이가 커서 손님 발에 맞춰 만들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여성 구두를 조금 커 보이게 만들어 드리면 안 될까요?”공장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절충안을 냈으나,“그럼 여성화 창에 남성화 디자인을 얹어 만들어 주세요.”라고 본인의 요구를 더 선명하게 말했다. “제가 진주에서 아지오 구두를 맞춰 신으려고 왔으니 제 부탁을 꼭 들어 주세요.”먼 데서 찾아온 손님의 부탁인지라 공장장은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의 주문을 수용하기로 했다. 어떤 신발이라도 만들 수는 있지만 이 경우에는 규격과 모양이 반비례하여 예쁘지 않을 수도 있어서 공장장이 머리를 긁적였던 것이다. 저 남녘 진주에서 잰걸음으로 달려온 특별한 손님이기에 생산부서에서는 몇 날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여 결국 그 구두를 만들어 보내 주었다. 어느덧 계절은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의 끝 무렵을 지나고 있다. 여러 일들과 많은 추억이 쌓이는 낙엽만큼 수북하다. 그간 아지오와 인연을 맺은 손님들의 수도 많이 늘었다. 모두가 소중하고 고마운 인연이어서 감사하는 마음이 해처럼 커졌다. 그러다 문득 지난봄에 남성화를 맞춰 신은 특별한 여성 손님이 떠올랐다. 그 구두가 잘 맞는지, 모양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주소는 국립 경남과학기술대학이었고 이름은 이은선, 신분이 경제학과 교수라는 정보를 들고 가을 고속도로를 달려 그를 만나기 위래 길을 나섰다. 특별한 손님이므로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이은선 교수와의 인터뷰무용을 좋아했던 은선이가... 이은선은 무용과 사물놀이를 좋아하던 아이였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은선이가 좋아서 재미있고 즐겁게 한국무용과 사물놀이로 초․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은선이는 예고에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무용인의 꿈을 실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렇게도 탄탄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IMF금융 위기에 동업자들의 고의 부도와 등 돌림으로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되면서 그 꿈을 접어야만 했다. 심한 좌절감에 빠졌지만 실패한 아버지가 신의와 성실의 자세를 잃지 않고 막노동을 해서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은선이는 이를 악물었다. 가난한 고교 시절을 교과서를 몽땅 외우는 방식으로 공부해서 틈틈이 쌓아둔 자원봉사 점수를 보태 고3 6월에 수시 전형으로 경희대 경제학과에 입학을 하게 된다. 예․체능에 대한 미련 때문에 대학 입학 후 약간의 방황과 학생운동에 참여하던 시기를 지나 논문이 지닌 힘을 깨달은 다음부터 학문의 세계로 접어드는 은선이! 고려대 대학원에서 행정학을 공부하며 사회적경제가 지닌 매력을 발견하고 석사와 박사 논문 모두를 이 분야를 주제로 쓴 최초의 인물로 그 이름이 빛을 발하게 된다. 1983년생 이은선은 한국무용의 꿈을 한국의 사회적경제 분야로 승화시켜 정책의 바탕이 되는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한 젊은 학자로 우뚝 섰다. 그리고 지금은 유학파가 아닌 순수 국내 박사로 국립 경남과학기술대의 2년차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며 끊임없이 논문을 생산해내고 있다. 우리나라 사회과학 분야의 교수 임용 연령이 평균 44.8세로 나타나는데 지금의 이은선 교수의 나이는...? ​▲ 이은선 교수의 석사 및 박사학위 논문과 명함아버지의 딸 이은선 교수 이 땅에 사는 자식들 모두에게는 아버지가 있다. 좋은 아버지, 자상한 아버지, 멋있는 아버지, 무서운 아버지, 든든한 아버지, 고생하는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이 교수에게 아버지는 버팀목이며 삶의 지표였다. 어릴 적에는 유망한 중소기업 사장님이셨고, 중학시절 큰아버지라고 부르던 사람들에게 전 재산을 날렸을 때는 서슴지 않고 일용직 노동자로 가족들을 지켜 주셨다. 대학시절 이교수가 약간의 방황과 학생운동 현장에서 잠시 흔들릴 즈음, 아버지는 폐질환으로 쓰러지시며 가족들을 놀라게 했고 그로 인해 이 교수는 강한 책임감을 얻어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스스로를 세워 나갔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이 교수가 대학 4학년 되던 해에 아버지는 위암 판정을 받아 다시 투병생활을 이어 가야 했다. 꿈꾸던 해외유학은 언감생심, 그저 주어진 환경 속에서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야 했던 이 교수는 더 강한 의지로 전문 분야를 파고들어 석사 과정을 무난히 마치고 나이 스물일곱에 박사 과정에 도전한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5년 투병생활을 잘 벗어나 1차 완치 판정을 받았고 그리고 5년 후에 이 교수가 박사학위를 받던 해에 아버지는 위암에서 완전히 이겨냈다는 판정을 받아 내셨다. 그간 뒤에서 눈물을 감추며 고생하신 어머니가 계셨기에 이 모두가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오늘의 젊은 이 교수는 말이 아닌 몸과 행동으로 긍정의 시그널을 선물로 주신 아버지의 딸이다. 좁은 길도 외로움 타지 않고 다른 방향에서도 근거로 맞서며 어려울 때도 물러서지 않는 뚝심이 아버지의 딸이기에 하나하나 이루어낼 수 있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 여겨진다.▲ 박사학위 수여식에서 아버지와 함께이은선 교수가 남성화를 신는 이유는? 이 교수는 지난봄에 특별히 주문하여 만든 아지오 구두를 자주 신는다. 여성화 창에 남성화 디자인을 얹은 그 신발이 생각보다는 잘 어울렸다. 그는, “중요한 행사나 주제 발표가 있을 때면 꼭 이 구두를 신습니다.”라고 한다. “이유가 따로 있는지...”물으니, 이공계열은 실험이나 연구 결과물을 통해 입증이나 주장이 가능하다. 그런 반면에 사회 과학은 역사성에서 각각의 현상 그리고 이념에 이르기까지 연륜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이론을 중시 여기는 경향이 농후하다. 즉 내용이나 연구 과정이 아닌 서열 중심의 풍토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젊은 이 교수는 연륜이 짧고 경험도 적은데다 여성이라는 조건에서 이런저런 차별을 받을 때가 적지 않다고 한다.  교수의 반열에 든 지금에도 왕왕 그런 일이 있어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남성복 스타일의 바지를 입고 신발은 거기에 맞춰 강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남성화를 신는다는 것이다. 이른 나이에 교수가 되어 여성으로서 발표와 주장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얘기였다. 이러한 현실은 이은선 교수가 더 왕성하게 활동함으로써 곧 해소되리라 믿는다. 이 교수는 가치 있는 사회적경제를 위해 가르치는 일과 더불어 학생들과 함께 현장에 나가서 사회적경제 확장을 위한 노력을 계속 해 나간다. 그리고 되도록 사회적경제 기업에서 생산하는 제품을 구매하는 습관을 바탕으로 그 제품들의 판매 촉진을 위한 고민도 끊임없이 이어간다.▲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목련꽃 하얀 송이가 피어날 때 진주에서 온 특별한 손님을, 아름다운 가을에 진주에 와서 다시 만나니 국화꽃 닮은 반가움과 근사하게 펼쳐질 사회적경제의 청사진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사람이 미래라는 말처럼 이은선 교수는 우리나라 사회적경제의 미래임에 틀림없다. 연륜도 경험도 필요하지만 지금은 참신하고 역동적인 젊은 생각이 더 필요할 때다. 유명 학술지에서 각광을 받은 이은선 교수의 논문들이 이제는 착한 사회, 공정한 경쟁, 아름다운 나눔을 위해 그 역할을 해 주리라 믿는다. 또 하나의 바람은 이교수가 맵시 있고 곡선이 예쁜 구두를 웃으며 신고 다니기를 아지오 가족들이 기원해 본다.​  올 가을은 이은선 교수로 인해 무척 행복하다.​▲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교정에서- 이은선 교수가 전해주는 편지:AGIO에 대한 나의 생각한참 박사과정 공부를 하던 중이었으니 2011년 아니면 2012년의 일이다. 사회적기업을 검색하다가 한 블로그에서 구두를 만드는 장애인작업장에 근무하는 사회복지사님이 절절하게 제품을 홍보하는 글을 읽었다. 청각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함께 일할 때 의사소통이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 구두를 만들어 오신 기술자님께 하나하나 배워가며 정성으로 구두를 만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작업장이 위치한 지역과 블로그의 지역은 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회적기업의 로고가 눈에 띄었다. 사회적기업들이 얼마나 홍보와 판로개척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특히 취약계층을 고용하고 계신 사회적기업들이 얼마나 힘들게 기업을 운영하고 계신지 알고 있는 나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가슴 찡함을 느꼈다. 백화점에서 판촉행사를 하는 부분이 강조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어렵게 기회를 잡으셨구나, 이 기회를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하시는구나.. 절박함이 느껴졌다. 한편으로 백화점 판촉행사에 참여할 정도면 다른 사회적기업에 비해서는 형편이 좋다고도 생각했다. 수년 뒤, 나는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 기업을 기사로 접하게 되었다. 대통령의 구두. 다른 곳에 비하면 형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 기업은 1-2년 뒤 폐업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대표님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수년 전 블로그에서 봤던 그 홍보 글이 정말 절박했던 것이었구나.. 그때 가서 한 켤레라도 살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죄송했다. 청각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어렵게 의사소통하며 기술을 배우고 그 기술로 제품을 완성했을 때 얼마나 성취감을 느끼셨을까, 얼마나 정성을 들였을까, 얼마나 보란 듯이 기업을 성공시키고 싶었을까.. 가장 마음이 아팠던 부분은 아직도 장애인이 생산한 제품은 품질이 떨어질 것이라는 편견, 브랜드가 아니면 외면하는 소비문화 때문에 이 소중한 사회적기업이 문을 닫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수개월이 지나 AGIO라는 이름으로 다시 일어섰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번에는 꼭 가서 한 켤레라도 구매하고, 또 만나서 진심으로 응원해드리고 싶었다. 내가 AGIO를 응원하는 이유는 아직도 뇌리에 박힌 "청각장애인의 꿈"라는 문구 때문이다. 어느 블로그였는지 아직도 기억은 나지 않지만 "청각장애인의 꿈"이라는 제목은 정확히 기억난다. AGIO는 단지 청각장애인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청각장애인들이 명품을 만드는 장인으로 성장하도록 꿈을 심어주고 꿈을 키우게 하고, 꿈을 실현하는 창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AGIO의 한분한분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고, 그 꿈이 현실이 되고 확산되어 더 많은 분들이 꿈꾸고 한발 한발 나아가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또한 AGIO와 함께, 우리사회의 수많은 사회적기업들과 함께 꿈꾸고 도전하고 싶다.  
이은선 / 교수 / 2019.11.10.
구두와 함께 울고 웃었던 50년
구두와 함께 울고 웃었던 50년-아지오의 마이다스 손, 이기노 사원과의 데이트​  망치소리와 트로트  구두만드는풍경의 사원은 모두 19명이다. 생산을 담당하는 사원 13명과 경영과 마케팅을 지원하는 6명이 열심을 다해 일한다. 스무 살 숙녀에서 일흔둘의 어르신까지 사원들 세대의 폭이 넓고 개성과 취미도 매우 다양하다. 오롯이 구두 밖에 모르는 안승문 공장장, 평소에 조용하다가도 이따금씩 버럭하는 전경수 공장장, 일찍 출근해서 궂은 일 도맡아 주는 이용만 반장, 60대 소녀 이정숙님, 엷은 미소로 마음을 보여 주는 김상진님, 말이 빠르고 몸이 앞서는 임택운님...   생산 현장에 들어서면 독특한 가죽 내음, 모양이 제각각인 발틀, 공정에 따라 놓여진 장비와 재료들, 우아한 곡선과 맵시가 아름다운 아지오 구두 여러 켤레가 부지런한 손끝에서 완성되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출입문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정해숙님의 환한 인사가 반갑고, 김영길님, 조순옥님, 전수연님의 능숙한 포장 솜씨와 10층 현장에서 5층 창고를 하루에도 수십 번 오르내리는 윤석구님, 고객관리와 상품 배송을 돕는 이상무님 그리고 사무실과 생산 현장을 바삐 드나드는 경영지원부 사람들까지, 매일매일 활기와 분주함이 계속된다. 아침 회의시간은 모두 진지하지만 간식시간에는 만면에 화색이 돈다.    맞춤 수제화 아지오는 청각장애인의 사랑과 정성이 배합되어 만들어 진다. 먹는 음식이 손맛에 따라 차이가 나듯, 구두 역시 손맛이 매우 중요하다. 손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하는 청각장애인들의 손맛은 좋은 구두를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장점을 가졌다. 그래서 아지오 구두가 편하고 품질이 좋기로 널리 알려진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시나요?  아침 8시 50분에 시작된 회의가 끝나면 생산 현장의 망치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따금씩 공장장의 말소리가 들려올 뿐 청각장애사원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일도 손으로 하지만 수다를 떨 때도 손으로 한다. 그런데 오전 11시가 다 될 무렵, 트로트 노래가 망치소리에 섞여 들려오기 시작한다. 분명히 청각장애사원들이 일하는 아지오 생산현장에서 나는 소리다. 살며시 다가가 귀 기울여 보니 우리 회사 최고령의 이기노님이 볼륨을 높여 놓은 트로트 음반이었다. 본인의 집안에 작은 시설을 갖추고 반주를 다운 받아 자기가 직접 노래를 불러 제작한 음반이었다. 기성 가수 못지않게 수준 높은 노래 실력을 가진 그가 왜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래서 오늘은 청각장애인들의 일터에서 트로트 노래를 들으며 아지오 구두를 만들고 있는 이기노님의 신상을 탈탈 털어 보기로 했다.시계를 72년 전으로 돌려서...  이기노님은 세는 나이로 72세다. 하지만 그의 나이는 만나는 사람과 장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어느 때는 73세, 우리 동료들과의 자리에서는 72세, 안승문 공장장은, " 형 나이가 74세 맞지?" 라고 한다. 탄력이 좋은 고무줄로 나이를 동여 맺는지...  1948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으로 전북 정읍으로 피난하여 성장한 그는 여섯 살 무렵 친구들과 놀다 넘어져 왼쪽 고관절을 심하게 다치고 만다. 당시 병원이 흔치 않아 무자격 접골원에서 비과학적인 시술을 받다 1차 피해를 입었고 한의원에서 굵은 침을 잘못 맞아 좌골신경 손상으로 2차 피해를 당해 지팡이 없이는 걷기 어려운 장애를 갖게 되었다. 가난한 집안 살림이라 더 이상 어찌 하지 못하고 양 손에 지팡이를 짚어가며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지독한 가난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큰아들인 그가 장애를 가졌지만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이기노님은 곧바로 혼자 서울로 올라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노점상과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아 2년 후에 고향에 있던 가족들을 서울 금호동으로 불러 올렸다. 막노동을 하던 그의 아버지가 장애를 가진 아들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다져 주기 위해 추천한 분야가 구두 만드는 기술이었다. 조금 규모가 있는 양화점에서 장인에게 풀칠하는 법으로부터 숙련된 기술을 익힐 때까지 약 3년간 용돈 수준의 급여를 받아가며 과정을 통과하여 견습생 딱지를 떼게 되었다. 그 후 서울 성수동 노룬산 시장에 있던 양화점에 취업하여 짭짤하게 돈을 벌었고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에, 미싱사로 일하던 여섯 살 연하의 직장 동료에게 끈질기게 구애하여 처가의 극렬한 반대의 벽을 뛰어 넘으며 결혼에도 성공하였다.   1969년, 성남에 둥지를 틀고 부지런히 재산을 불리며 아들도 낳고 양화점도 아내와 함께 경영했다. 그러는 동안 대형 구두 메이커들이 터무니없이 싼 가격으로 시중에 상품을 내 놓으면서 사업이 위축되어 결국 21년 고락을 같이 했던 양화점 문을 닫아야만 했다. 뒤이어 도급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에 취업하여 다시 일을 하다가 약간의 공백기를 지나 우리 안승문 공장장과의 오래된 인연으로 2018년 1월에 구두만드는풍경 최고령 사원으로 입사하여 청각장애인들과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50년 숙성된 기술과 재능을 청각장애사원들과 나누어 가지며 매우 즐겁게 아지오구두를 만들고 있다. 젊디젊은 마음으로...  이기노님이 트로트를 부르는 까닭은...?  그의 목소리는 나이에 비해 미성이다. 반주에 맞춰 부르는 그의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청순함과 흥겨움이 그대로 느껴진다. 좀 더 심취해 보면 아픔과 고생이 들어있고 견딤과 기쁨도 가슴에 와 닿는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설상가상으로 떠안은 장애, 그로 인한 친구들의 놀림들... 괴로움이 적지 않아 좌절과 포기 사이에서의 갈등이 많았으리라. 그래도 그는 어린 나이에 가족을 부양했고 스스로 노력하여 지팡이를 버리고 혼자 걷는 투지를 보였다. 구두쟁이의 삶에서도 부지런함과 열정으로 양화점 사장의 위치를 지켰다. 하지만 또 다른 시련의 그림자는 오랜 시간 그와 그 아내를 짓눌렀다. 건강하게 군 생활을 하던 큰 아들이 선임병의 위협과 폭행의 충격으로 우울증, 조현병, 당뇨 등의 합병증으로 20년 넘게 투병생활을 했고 그 자식을 뒷바라지 하느라 청춘이 새까맣게 타 버렸다. 3년 전에 그 아들을 앞세워 천국으로 보내고 지금은 아내와 작은 아들을 알뜰히 살뜰히 챙기며 소확행을 누린다. 주말에는 연로하신 처 고모를 보살피는 일과 아내와 맛집 기행을 하며 정을 나누고 알콩달콩 행복을 만들어 간다. 이기노님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다. 어린 시절 멋모르고 장애인이라 놀려대던  초등학교 동창생들과의 기분 좋은 모임이다. 남자 40명, 여자 18명 동창들이 전세버스를 타고 여행도 가고 색다른 모임을 가지면서 우정을 나누는 일이다. 서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가 트로트를 부르는 까닭은 노래로 인생을 찬찬히 추억하고픈 마음일 것이다. 고생과 아픔도 네 박자에 싣고 기쁨과 행복은 흔들고 잘 꺾어 환하게 마이크에 담아 크게 확성해 보려는 바람이라 여겨진다. 벌써 300곡에 가까운 트롯트 곡을 연습하고 다듬어서 음반에 실어 놓았다고 한다. 이 노래들이 아지오 구두 한 켤레 한 켤레에 베어 들어 고객들의 걸음과 함께 하리라 믿는다.  구두와 웃고 구두와 울었던 50년  1970년대 말에 있었던 일이다. 이기노님이 사업장 이름을 '허리우드양화점'으로 간판을 걸고 영업을 했는데 당시 우리말 쓰기 운동을 장려하던 학교 선생님과 아이들이 찾아 왔었다. 그 이유는 '허리우드'라는 말이 외래어이므로 우리말로 바꾸기를 권하기 위해서였다. 간판을 새로 하면 돈이 쏠쏠하게 들을 거 같아 이렇게 둘러댔다고 한다. "소의 가죽 중에 허리부분이 제일 좋아서 소 우자를 뒤에 붙여 허리우드로 지었다."라고 변명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유명 구두회사 명칭으로 간판을 걸었다가 명의 도용으로 개선명령을 받자, 역시 간판 설치비용이 아까워 '강'자를 '광'자로 살짝 고쳐 무사히 넘어간 일도 있었다. 재치와 익살이 철철 넘치기도 하는 이기노 사원!  구두만드는풍경에서의 이기노사원은 청각장애 사원들에게 구두의 기초를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과 중요한 지점에서 경험적 지식을 제공하는 보험회사의 기능을 한다. 처음에는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많이 당황하는 모습을 왕왕 보았는데 이제는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사원들을 다독이며 재미있게 작업을 한다. 청각장애 사원들도 그를 잘 따르며 이렇게 저렇게 아버지를 받드는 심정으로 챙기며 호흡을 맞춘다. 구두와 함께 웃고 구두와 함께 울었던 기노 사원의 삶이 생산현장 곳곳에 묻어 있다. 무관심한 듯 하면서도, 걱정하고 야단치는 듯 하면서도 정을 주는 느낌이 전류가 되어 흐른다.   아직도 아지오가 넘어야 할 산은 높고 가야 할 길이 멀다. 방법과 비용만으로 다 해결할 수 없고 자본과 아이디어만으로도 냉혹한 시장을 이겨내기 어렵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의식과 고객들의 소중한 요구를 읽을 수 있는 마음 그리고 지혜가 더 많아야 한다. 하루하루 노력하고 끊임없이 성찰하며 백년을 이어갈 내공을 쌓아 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 아지오는 50년 이기노 사원의 기술과 경험과 지혜를 무척 존중한다. 눈물과 웃음도 빌려 쓰고 익살과 재치도 응용하며 친구처럼 편한 구두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청각장애인들의 행복한 내일이고 고객들의 건강과 성공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기노 장인님, 앞으로 쭈욱 아지오와 함께...!​ 
이기노 / 구두장인 / 2019.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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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지오가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