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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Agio
아지오를 소개합니다.
Agio Journal
아지오를 신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어느 선생이 한여름에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
​어느 선생이  한여름에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 애정과 지식을 버무려 후학을 길러내는 수원여대 사회복지학과 이계존 교수아지오저널 8월호는 이계존 교수가 직접 글로 써 내려간 삶의 이야기와 장애인 사랑 그리고 아지오에 바라는 마음을 함축해보기로 한다. 빈한한 아침 유산...       난 새벽에 일어나서 하루를 일찍 준비한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나의 습관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시작되었다.    장사 채비를 위해 새벽녘 집을 나서는 아버지를 마중해야 한다는 어줍지 않은 장남의 의무감에서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일찍 일어나 마땅히 할 일이 없었기에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시아방송이나 극동방송을 듣곤 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심심하면 괜히 성경책을 뒤지고 교과서 등을 훑어보기도 했다. 종내 이마저도 싫증이 나면 이런저런 쓸데 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대학시절에도 만원버스는 너무 싫었다. 러시아워의 막히는 길, 사시사철 만원 버스에서 흘리는 땀, 이성과 밀착된 상황에서의 극도의 신경 씀 또는 자리를 두고 벌이는 날카로운 신경전 등등.난 아침 버스에서 이미 그날의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리곤 했었다. 그리하여 난 이른 새벽에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새벽 공기를 가르는 한적한 버스에서 '삼중당' 문고를 읽는 호사스런 여유를 가지며 등교하곤 했었다. 요즘에도 가능하면 새벽에 일어나 이른 출근을 한다. 뻥 뚫린 도로와 새벽의 상쾌함 그리고 여유 있게 시작하는 하루.이른 시간 도착한 학교에서 한적한 교정도 둘러보고 또 연구실에 앉아 그 누구, 그 무엇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고 보고 싶은 책을 훑어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생각도 하며 이른 아침 나만의 여유를 즐긴다.   누군가 수 많은 재산을 아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고 그나마도 더 큰 것을 주기 위해 편법 증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아들에게 남겨줄 재산은 무엇일까. 솔직히 부채나 떠넘기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다.  하지만 아들에게 뭔가를 남겨주고 싶은 것이 가진 것 없는 이 애비의 간절한 바램이다. 그리하여 난 아들에게 여유있는 아침을 남겨주고자 한다. 내 아버지가 내게 그랬듯이 '새벽녘에 일어나 시작하는 여유 있는 하루'를 아들에게 물려주고자 한다.지난 여름, 난 아들에게 한 가지의 과제를 요구했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이 아들놈 얼마간 잘 지키는 듯 하더니 요즘은 약간 해이해진 듯 하다. 그러나 분명 이 애비의 서글픈 유산을 소중히 지켜나가리라 믿는다.성인은 자신을 위해 쌓아두는 법이 없다(聖人不積, 노자 '도덕경'에서). 나의 황당한 합리화여!이계존의 대학시절: 내안의 큰 스승, K교수님을 그리며   1980년대 초반, 대학생으로 살아가기가 무척 힘들었다. 당시 야만성에 근거한 집권세력에 대해 분노했었다. 하지만 서슬 퍼런 정권의 폭압에 대항하여 감히 나서지는 못하였다. 그저 속앓이만 했을 뿐이었다. 반면 자신의 입신영달은 멀리하고 야만적 정권에 감히 대항하는 일부 학우들도 있었다. 이들을 보면서 난 나의 비겁함을 마냥 부끄러워했었다. 그리고 하릴없이 술집으로 향했다. 비겁함을 감추고자 하는 술로 인한 비틀거림을 교묘하게 명정(酩酊)이라 합리화하는 등, 내 학부 시절은 그다지 바람직하지만은 않았었다. 그렇지만 학부 지도교수였던 김종옥 교수님(1928~2007)은, 늘 나를 ‘우리 계존이’라 칭하며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셨다. 하루는 낮술에 취해 오후 수업에 들어온 나를 ‘우리 계존이, 어제 먹은 술이 아직도 깨질 않았구나.’ 하며 감싸주시기도 했었다.학부 졸업을 앞두고 교수님께 인사를 갔었다. 반갑게 맞이하면서 교수님은 “그래, 우리 이 선생, 졸업을 축하한다.”고 말씀하셨다. 늘 ‘계존아! 계존아!’ 하시던 교수님이 갑작스레 나를 ‘이 선생’ 이라 칭하셨던 것이다. 다소 당황해하던 내게 교수님은 짧지만 아직도 부담이 되는 강의를 해주셨다. “이제까지 넌 내 제자였기에 ‘계존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제 너도 사회복지 전문가로서 출발하기에 당당한 나의 동료이며, 쉽지 않은 사회복지 업무를 같이 수행해야 하는 든든한 동료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부터 너를 ‘이 선생’ 이라 칭하겠다.”방황만 가득했던 나의 대학시절, 그럼에도 졸업과 동시에 날 든든한 동료로서 인정하시던 교수님의 모습은, 졸업한 지 이십 수년이 흐른 지금도 또렷이 기억된다. 돌이켜보면 교수님은 결코 학교라는 공간에서 학업에 전념하지 않았던 나와 같은 학생들을 평가 절하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면서 그 이면의 전혀 구체화되지 못한 각자의 가능성에 주목하시고 모두에게 두루 따듯함을 보여주셨던 것이었다.  차분한 마음을 얻고자 즐겨보는 이철수선생의 판화 중 유난히 내 시선을 끄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다소 성의가 없을 법도 한 단출한 줄기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논에서 잡초를 뽑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벼와 한 논에 살게 된 것을 이유로 ‘잡(雜)’이라 부르기는 미안하다.”​  우리 모두는 각자 충분히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러나 논이라 임의 규정된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 일부가 그저 ‘잡’ 이라 칭해지고 마침내 솎아지는 것은 분명한 야만이다. 보다 많은 소출을 얻고자 하는 욕심이 일견 이해도 된다. 그러나 논에 있다는 이유에서 스스로의 아름다움에도 부질없이 솎아져 버려지는 잡(雜)들의 아픔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선생으로서 나는 늘 하나의 다짐을 한다. 학교 또는 교실이라는 공간 규정에 천착하여 너무도 아름다운 제자들을 고루한 하나의 틀로 재단하고, 이따금 그 틀에서 어그러질 때 몰인정하게 솎아 버려지는 야만 그리고 그 야만으로 인한 누군가의 아픔이, 우리 교육공간에서는 없어야 함을.   내 다짐의 이면에 큰 스승으로 김종옥 교수님이 늘 자리하기에 난 또 한 명의 김종옥 교수이기를 갈망하고 있다.  팔불출 이계존: 바위 같은 년   참석하기 곤혹스런 교내 행사의 하나가 사은회다. 그 동안 별로 가르친 것도 없이  제자들을 척박한 실무 현장으로만 내모는 것 같다. 한켠 미안하고, 한켠 안쓰럽다. 그래서 사은회에 오라는 제자들의 초청에 난 '안 갈거다'라고 외치곤 한다.  여지없이 금년 사은회에도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저런 절차가 진행되고 사회자가 마련한 여흥은 요즘 유행한다는 다섯 단어로 묻고 다섯 단어로 답하기였다. 사회자가 질문하고 이에 교수가 답하는 형식이었다.  별스런 질문과 기상천외의 답변이 오고갔다. 그러다 내 차례가 되었다. 질문은 ‘사모님자랑’ 이었다. 이게 왠 뜬금없는 질문인지. 이런저런 말을 만들며 손가락으로 그 수를 꼽아보았다. 사회를 보던 친구가 굳이 다섯 글자가 아니어도 되니 사모님 자랑을 하라고 했다. 마누라 자랑, 화려한 것도 내세울 것도 없다. 그러나 그 든든함은 내게 큰 힘이 된다. 마치 청마 유치환의 시 마냥 '두 쪽으로 깨뜨려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 와 같다.  이런 팔불출의 자랑을 하고 난 후 난 다섯 글자로 마무리를 해야 했다. 바위같은, 네 글자까지 얘기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 '바위 같은 년'.나중에 생각해 보니 '바위같은 처(妻)' 등 근사한 마무리 말이 있으련만 그때는 '년'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바위 같은 년, 마누라는 내 이런 얘기를 듣고도 꿈쩍하지 않는다. 진짜 바위 같은 년이다.   술자리에서 진 빚, 이후 갚아야 할 빚   곱창볶음을 먹고자 마누라와 함께 수원 지동시장을 갔다. 올망졸망 모여 있는 곱창 가게들이 정겨웠다. 모든 집이 비슷하련만 상호가 눈에 익은 한 집을 택해 자리를 잡았다. 곱창볶음과 소주를 시켰다. 그리고 무던하게 곱창 끓기를 기다렸다. 한잔 술에 어울릴 안주가 마련되기를.그저 철판만 지켜보고 있는데, 한 노부부가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등산 후 저녁을 먹으러 왔는지 노부부도 국밥과 역시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시장통의 투박한 집이기에 모든 식탁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보글보글 끓고 있던 우리의 볶음이 다소 요란하다고 생각하던 찰나, 옆자리의 할아버지가 한마디를 했다. “곱창은 당신들이 먹는데 철판이 우리 쪽에 가까워서 국물이 튈까 염려된다.”다소 시비조의 내용이었지만 할아버지의 표정은 연신 익살스러웠다. 철판의 위치를 옮기려던 나를 제지하며 할아버지는 “괜한 소리를 했다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고. 잠시 동안 옆자리와 서먹한 가운데 왕후의 소주 그리고 시장통의 곱창으로 우리 부부의 만찬이 마련되었는데, 마누라는 곱창 볶음을 자그마한 앞 접시에 담아 옆자리 노부부에게 건네면서 한 마디, “어르신! 양은 많지 않지만 안주 삼아 드시라”고. 마누라의 호의는 이내 한잔 술로 화답 되었다. 할아버지 왈(曰), “국밥을 나눠줄 수는 없고, 소주 한 잔 주겠다.”며. 또 한 잔 술을 받은 나는“그냥 말 수 없다”며 할아버지에게 다시 한 잔을 드렸고. 그렇게 노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며 때로는 각기 서로의 얘기에 집중하며 시장통에서의 우연한 한잔을 즐겼다.술이 모자랐기에 할아버지와 나는 각기 아내의 도끼 눈, 그 눈치를 봐가며 한 병씩을 더 시켰다. 그리고 그마저도 바닥을 보이자 먼저 할아버지가 또 다시 한 병을 호기롭게 추가하려는 순간, 할머니가 끝내 자리를 박차고 나가셨다. 다소 삐친 할머니의 모습에 할아버지는 별수 없이 우리와 작별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잠시 후 할머니가 우리 자리에 오더니 한마디를 건네셨다.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그리고 “두 테이블의 술값 모두 계산했다.”고. 난 놀라며 즉시 노부부를 따라 갔다. “만일 계산을 한다면 우리가 해야지, 이건 아니다”라며. 한데 할아버지가 한마디를 하셨다. “우연히 만난 옆자리의 젊은 친구에게 한잔을 사는 즐거움이 있다”고. 그리고 “만일 이것이 부담된다면 오늘의 채무를 더 젊은 누군가에게 이후 갚으라.”고. 노부부의 호의를 통해 공짜 술의 진미를 맛보았으며, 특히 우리 사회에 팽배한 세대 간의 불편이 일순 해소됨을 느꼈다. 할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이번 주말 ‘지동시장 곱창집’으로 가서 젊은 누군가에게 ‘빤한 수작’을 하고 이후 ‘정겨운 한잔’ 을 편하게 마시고 ‘그 술값’ 을 대신 내줘야겠다고.​​장애인 마술단 몰락사(沒落史)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장애에 대한 여전한 편견이 있다. 그 연원은 어찌 보면 어린 시절부터 장애인과의 교류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여 장애인복지 전공자로서 나는 장애에 대한 올바른 인식 형성에 기여해야 하고, 그 하나의 전략으로서 자연스레 장애인과 아이들이 교류하고 소통하는 장을 마련해 줘야만 한다. 오래전부터 장애인과 아이들이 함께하는 장으로서 마술을 생각했다. 장애인이 마술공연을 하고 아이들이 이 공연을 본다면 마치 ‘마술’ 처럼 편견은 없어질 거라 기대하면서. 그리하여 몇 해 전 지적장애 십여 명 그리고 시각장애 한 명을 선발해서 마술교육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사실 마술이란 어찌 보면 교묘한 눈속임일 수도 있다. 한데 지능이 다소 모자라는 지적장애인 그리고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마술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행했었다. 힘들어하는 장애 친구들을 도닥거리며 몇 달 동안 마술교육을 계속했다. 마술사로서 현란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저 서툰 마술일지언정 이를 매개로 아이들과 교류하고자 하는 것이 우선되는 목적이었다. 힘든 교육 끝에 마침내 장애인 마술단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성남의 한 어린이집, 십 수 명의 아이들을 앞에 두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당일 올려진 마술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들이었다.   한참 공연이 진행되고 있는데 한 아이의 지적이 있었다. “나 저거 알아. 어디로 넘기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그놈이 눈속임의 비밀을 까발린 것이었다. 고약한 스포일러였다. 공연하던 지적장애 마술사가 갑자기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나치게 긴장했던 친구였는데 스포일러의 개구진 한마디에 완전히 마비가 되었다. 주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공연을 마치고 그 친구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후 후속 공연을 못할 정도로 마술단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단장으로서 내 고민이 시작되었다. 스포일러를 방지하며 아이들이 순진하게 마술세계로 빠져드는 전략을 찾아야 했다. 한데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더 나이가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하면 될 것이었다. 이렇게 얄팍한 계략으로 이후 공연이 기획되었다. 한층 더 어린 관객들은 순진하게도 마술사의 눈속임에 충분히 현혹되었다. 그리고 공연 마술에 대해 그저 감탄사만을 연발했다. 성공적으로 공연이 종료되었다. 초연에서 긴장하고 눈물을 쏟았던 그 친구까지 모두의 입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모두가 고무된 상태로 마술 도구 등을 정리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다가왔다. 그리고 방금 전 공연을 마친 시각장애 마술사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한마디, “아저씨 나 보이지 않지. 나랑 악수하자, 악수를 하면 친구가 된다.” 천진한 한 아이의 성원에 장애인 마술단 단장으로서 내 보람이 매듭 되었다.  이후 난 장애인 마술단을 계속하기 위해 후원처를 개발하고자 했다. 중앙부처, 경기도 그리고 전문기관 등에 그동안의 성과를 이야기하며 지원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장애인마술, 시작은 했지만 종내 계속하지 못한 나의 끈기 없음에 그저 아쉬웠던 하나의 기억으로만 남았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모 방송국 예능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한데 너무도 익숙한 한 친구가 마술을 공연하고 있었다. 가장 초보의 마술이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기에 지켜보는 사람의 탄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공연 이후 진행자가 물었다. “마술은 어디서 배웠냐?”고. 그는“오래전 한 기관에서 장애인 대상의 마술교육이 있었는데 그때 배웠다.”고 답했다. 그는 내가 단장이던 그 마술단의 단원이었다. 그리고 한 아이와 친구가 되자며 악수를 나누었던 바로 그 시각장애 마술사였다.방송에서는 그의 바람도 소개되었다.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 마술사로서 마술을 계속하겠다. 그리고 신체 분리의 마술을 배우고 싶다.” 마침 패널로 출연한 유명 마술사가 멘토로 마술을 가르쳐 주기로 약속했다. 내가 시작했던 그 일, 주변의 지원이 없어 중단했던 그 일, 그 일을 나의 클라이언트였던 친구가 외로이 계속하고 있었다. 든든한 친구다. 고맙다.우리나라 장애인복지의 든든한 뿌리  “장애아는 사회에서 격리시켜라(플라톤)”, “장애아를 양육하지 못하도록 법을 제정하라(아리스토텔레스)” 등 장애인에 대한 비인격적 인식과 가혹한 처우는, 놀랍게도 서양 철학의 초석을 다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주장이었다. 이와 같은 장애인관은 중세에 최악의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장애인을 ‘신에게서 벌을 받은 사람’ 또는 ‘자신들과는 다른 신을 섬기는 괴물’로 규정하여 비장애인과 엄격하게 분별하였다. 심지어 장애인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지르면서 “너희가 모시는 신이 있다면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대심판의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장애를 질병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등 체계적인 장애 개념을 구축하여 왔다. 즉, 위독한 질병을 ‘독질(篤疾)’, 몸에 남은 질병을 ‘잔질(殘疾)’ 그리고 고칠 수 없는 질병을 ‘폐질(廢疾)’로 구분하였다. 또한 이러한 구분하에 각각 상태에 따른 치료 및 복지 시책을 제공하였다. 조선시대 시행된 대표적인 장애인 대상의 복지 시책은 다음과 같다. ① 장애인 및 그의 가족에게 각종 부역과 잡역의 면제, ② 장애인 학대나 살해의 경우 가중 처벌, 또한 이러한 경우 해당 고을의 읍호 강등 등 집단 책임 강조, ③ 점복, 독경, 악공 등 잔존능력을 고려하여 관직 등의 일자리 창출, ④ 명통시(明通寺) 등 장애인단체 운영 및 지원.  서양의 경우 장애인을 보는 초기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인권과 복지에 대한 의식의 진전 그리고 전쟁이나 산업재해 등을 통해 양산된 다수 장애인에게 보상적 차원에서 다양한 정책이 확대되면서 장애인복지가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왔다.   반면 우리나라는 장애인 인권 존중 및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혜택 등의 전통적 기반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되었고,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목표 달성과 속도만을 중시한 결과 대부분 상실되었다. 돌이켜 ‘뒤’를 보는 역사의식, 그리고 따듯한 시선으로 ‘옆’을 보는 연대ㆍ복지의식 등이 결여된 채, 그저 ‘앞’만을 편향적으로 바라보는 압축성장기를 거치면서 장애인은 점차 소외되고 소극적 존재로 전락하여 왔다.   무조건 외국의 제도만을 쫓지 말고, 우리 안에 있었던 든든한 뿌리를 다시금 확인하고, 이제라도 되살리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유대표 그리고 아지오에 대한 기대   유석영대표가 아지오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친구로서 난 반대를 했었다.   반대의 변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대통령의 구두에 대한 언론 보도 등으로 상당 관심이 일었지만 그 지속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라는 것. 중국산 중저가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시장에서 다소 고가인 수제 구두의 수요는 제한적이라는 것. 그리고 다양한 신발을 착용한다는 요즘의 소비 형태를 고려할 때 고급 신사화나 숙녀화의 재구매 주기가 매우 길다는 것 등등. 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 대표는 고집스레 아지오를 다시 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열심히 뛰고 있다. 그러기에 친구로서 난 누구나 할 수 있는 반대 그리고 부정적 전망보다는 그에게 또 아지오에 대해 이런 흐뭇한 기대를 하게 되었다. 아지오가 직접 구매 예상자에게 마케팅을 할 수 있다. 누군가 제3자가 아지오의 탁월함을 PR할 수도 있다. 또는 지속적으로 아지오의 구매를 매체를 통해 광고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기대하는 것은 이러한 마케팅도, PR도, 광고도 아니다. 바로 브랜드로서 아지오의 정립이다. 없어서 사는 것이 아니다. 떨어지고 헤져서 사는 것도 아니다. 또 다른 제품보다 더 좋아보여서 사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사는 것이다.  그냥 아지오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자존감을 가지게 되는 브랜드의 경지이다.   브랜드로서 이지오의 정립은 분명 어려운 과업이다. 그러나 내 친구 유대표 그리고 자신의 일에 몰입하는 아지오의 식구들이 있기에 반드시 달성될 과업이다.
이계존 / 교수 / 2019.8.1.
손으로 만들어가는 아지오 세상
손으로 만들어가는 아지오 세상   두 번째 맞이하는 아지오의 여름 ▲ 2019 아지오 직원 워크숍-제주도​벌써 여름이다. 칠월이 덥다. 푸르름이 가득이다. ​문을 다시 연 구두만드는풍경이 두 번째 여름을 맞는다.갖춘건 없는데 풀어야 할 숙제는 아직도 넘친다.​부지런 떨며 열심히 일했는데 주머니는 가볍다. ​▲ 열심히 구두를 만들고 있는 아지오 직원들​틈만 나면 도망치는 시간을 붙잡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그래도 다행인 건 아지오와 친한 사람이 많아졌다.만드는 구두의 가짓수도 늘어서 제법 잘 팔린다.​욕심대로라면 얼른 부자 되어 어엿한 기업으로 성공의 깃발을 꽂고 싶은데...차디찬 시장이 호락호락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여름 하나가 가더니 덤벙대는 사이에 금새 또 하나의 여름이 왔다.벌기 무섭게 나가는 돈 챙기느라 청포도 익는 줄도 몰랐다.섭섭하면서도 허무하고 흐뭇하면서도 아쉬움이 적지 않다.그래서 오늘은 잠시 숨을 고르며 편하게 아지오 이야기를 했으면 한다.모두가 '아지오 매거진' 초대 손님이 되어 마음을 나누기를 주문해 본다.우리 함께 두 번째 아지오의 여름 속으로 들어가 보자.   대통령의 구두에서 시민의 구두로, 시민의 구두에서 친구보다 더 좋은 구두로... ​아지오의 시작은 정말 단순했다. 솜씨 좋고 능력 많은 청각장애인들의, 행복한 일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잘 만들어 열심히 팔면 그 목적은 달성되리라 생각했다.  ▲ 아지오 시즌1 시절​하지만 전쟁터와 같은 시장은 결코 아지오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유목민처럼 행상하며 이곳 저곳 찾았으나 역부족임을 실감했다.결국 더 이상의 빚더미를 짊어질 힘이 없어 펑펑 울며 문을 닫아야만 했다.2012년 9월에 국회에서 손님으로 만난 문재인 후보!​서슴치 않고 한 켤레 사 신고 무척 기뻐하시던 그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밑창이 갈라지도록 신었다는 소문이 아지오의 부활을 견인했다.그 때부터 아지오는 '대통령의 구두' 아니 '문재인 구두'로 별명을 얻었다.      ▲ 2019.3. 11. 말레이시아 순방 때 아지오 7005 블랙&화이트를 신은 김정숙 여사님  ▲ 문재인대통령께서 주문한 아지오 구두를 전달하는 유석영 대표 ​그 구두가 시민의 구두로 이어진데는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아지오 사랑 때문이다.시즌1에서 모델로 나섰고 시즌 2의 문을 함께 열며 주 모델로 다시 등장하셨기에...지금은 시민의 구두가 그 편안함으로 인해 친구보다 더 좋은 구두로 이어지고 있다.물론 그 바탕에는 50년 구두 장인의 출중한 기술력이 배어 있다.그와 더불어 청각장애인들의 손 끝에서 나오는 정성과 섬세함도 들어 있다.아지오가 두 번 여름을 맞으며 고객들을 존중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역시 대통령의 구두요 시민의 구두이며 친구보다 더 좋은 구두이다.온 세계가 깜짝 놀란 기쁜 소식 하나...!판문점에서 이루어진 첫 남북미 정상 만남에 구두만드는풍경이 큰 박수를 보낸다.지금부터는 우리 아지오가 통일의 구두로 그 역할을 다해 주기를...       ▲ 아지오 모델이 되어주신 유시민 작가님 ▲ 아지오 드레스 1001 브라운, 1002 블랙, 슬립온 4001 네이비   부조화 속의 조화 ​구두만드는풍경의 대표는 시각장애인이다.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청각장애인들이가.안 보이는 CEO와 안 들리는 기술인이 한 솥밥을 먹는다.이러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아지오에 대한 염려가 크다.어떤 방법으로 소통하며 어떻게 구두를 만들어 내느냐는 것이다.​정작 우리는 아무 문제 없이 명품 아지오를 척척 만들어 낸다.​불편하고 더딘 부분은 있으나 오해와 불신은 거의 없다.오히려 더 분명하게 묻고 더 충분하게 확인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얻는다.사회적협동조합 구두만드는풍경의 조합원은 36명이다.상시근로인은 청각장애인 10명, 지체장애인 1명, 시각장애인 1명, 비장애인 6명이다.현재 생산하는 구두모델은 31종 70여 색상별 제품이 수제화로 제작된다.판매망은 '아지오몰',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엘롯데', 'CJ O쇼핑 등에서 판매한다.현재 발을 직접 실측하여 아지오를 구매한 고객의 수는 7천 여 명에 달한다.또 하나의 아지오 파워가 있다. 모델료로 구두 한 켤레를 받고 순수하게 재능을 내 준 사람들이다.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님, 유희열 대표님, YTN 변상욱 대기자님, 이상순님-이효리님 부부, CBS 김현정 앵커님, 의리 탤런트 김보성님, 아나운서 최선규님, 개그우먼 김지선님...안 보이는 CEO와 안 들리는 기술인의 결합은 결코 부조화가 아니다.그야말로 부조화 속의 조화, 환상의 콤비이다.▲아지오의 모델들손으로 만들어 가는 아지오 세상  ▲ 수어로 노래하는 아지오 직원들아지오는 손으로 사랑을 말하고 손으로 꿈을 꾼다.큰 소리도 귓속말도 아닌 손으로 정직을 이야기한다.고객들의 발에 꼭 맞도록 일일이 손으로 어루만지며 구두를 만든다.돈의 크기보다 사람의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긴다.아지오는 좋은 구두이므로 신는 사람들을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우리들의 손은 정직하고 건강하기에 좋은 구두를 만들 수 밖에 없다.고객들로부터 받은 애정을 선하게 되갚아야 하기 때문이다.이 여름 뜨거운 날에 우리는 새로운 꿈을 꾼다.참된 생각을 손에 담아 자유와 평등이 범람하는 아지오 세상을 만들 것이다.조금이어도 나누고 모자라도 베풀며 더 어려운 곳에 먼저 달려갈 것이다.이제부터는 손으로 만들어가는 아지오 세상을 많이 기대해도 좋다.말보다는 손이 실천하는 힘을 더 많이 갖고 있으므로...
구두만드는풍경 / 맞춤형 수제 구두를 만드는 사람들 / 2019.7.1.
신록이 아름다운 평창에서 오십대 소녀를 만나다.
신록이 아름다운 평창에서 오십대 소녀를 만나다-주는 사랑보다 받는 사랑이 더 많은 김현미 사회복지사와의 데이트-     '다소니'에서 꿈을 꾸는 사람들 ▲ 참신한 아이디어로 꿈의 크기와  빛깔을 새롭게 다듬어가는 오십대 초반의 소녀 김현미 사회복지사명품 아지오가 6월의 신록을 따라 강원도 여행에 나섰다. 찐빵이 유명한 안흥을 지나 평창 방림면 계촌리에 당도하니 길 따라 늘어선 계수나무들이 푸른빛 웃음으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이 마을에 우리 구두만드는풍경 이선우 이사가 운영하는 장애인거주시설 '다소니'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 3월에 '다소니' 식구들이 우리 회사를 방문하여 수제화가 만들어지는 모습도 보고 직접 발 크기를 재어 맞춤 아지오를 장만했었다. 혹시라도 수선이 필요하거나 다른 불편한 점이 있을 수 있어 아지오가 출장을 겸하여 이곳으로 반나절 여행을 온 것이다.'다소니'라는 뜻이 순수 우리말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 이름처럼 집도 예쁘고 주변 풍광도 참 좋다. 그 뿐 아니라 30명의 장애이용인과 25명의 직원들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정을 나누며 알토란같은 꿈을 키워가는 일상이 온통 행복으로 느껴졌다. 그런 '다소니' 사람들이 아지오가 대통령의 구두이며 청각장애인들이 손으로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에게 먼저 손짓을 해 주어 구두만드는풍경 사원 모두는 크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본인이 직접 사 신기도 하고 사위와 아들에게 선물하는 사람, 아내와 남편에게 사랑의 선물로 전달하는 고객들도 있었다. 특히 발이 작거나 변형의 정도가 큰 장애 이용인들의 관심도가 높았다.​▲ 다소니 가족들이 아지오 구두를 신고 퍼포먼스를~~^^그 가운데 아주 오래 전부터 아지오를 알고 그 가치를 존중하며 본인도 한 켤레 사 신고 대학원을 졸업하는 아들에게도 한 켤레를 선물한 사회복지사 김현미 주임을 만날 수 있었다. '다소니'에서 여성장애인들의 생활 지원을 담당하며 참신한 아이디어로 꿈의 크기와 빛깔을 새롭게 다듬어가는 오십대 초반의 소녀였다.   잠깐! 이 즈음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자.현미씨와 다소니 사람들의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현미씨와 마주 앉아 의미 있는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고 잘 엮어서 아지오 매거진 6월호를 꾸며 보기로 했다.▲ ‘다소니’에서 유석영대표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김현미 사회복지사​현미씨가 처음 만난 아지오   "저는 아지오 시즌1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시작해서 어떤 방법으로 일을 했으며 왜 폐업했는지도 대략은 알고 있었습니다."현미씨의 얘기와 표정을 보았을 때 그냥 조금 아는 정도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아지오의 성공을 바라며 마음속으로 애지중지 했고, 기회가 되면 반드시 아지오 구두를 사 신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미씨가 아지오 구두를 사 신으려 했을 때에는 이미 구두만드는풍경이 폐업한 뒤였다. 결국 아지오 구두를 마음에만 담고 지내오던 현미씨였는데, 뜻밖의 장소에서 아지오 구두를 발견했다. 2015년 어느 신발코너에서 선명하게 'AGIO'라고 새겨진 상표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한 켤레를 구입했다. 그의 짐작은 아지오가 폐업하면서 남은 제품을 내 놓은 거라 여겼었다. 그러나 그 구두는 인천에서 구두를 생산하던 P씨가 바람직하지 못한 상술로 장애인을 폄하하며 짝퉁 아지오를 적지 않게 시장에 풀어서 판매되었던 신발이었다. 우리 구두만드는풍경이 폐업의 아픔도 컸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적지 않은 충격과 상처를 입었었다. 하필이면 현미씨와 아지오의 첫 만남이 짝퉁 아지오였다는 사실에 속도 상하고 입맛도 씁쓸했다. 우여곡절 끝에 시즌2로 부활한 아지오는 현미씨에게 큰 기쁨이요 희망이었다. 그래서 작정하고 본인의 구두를 얼른 사 신고 아들의 졸업 선물로도 아지오를 기쁘게 선물했다. 그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드는 생각 하나는, 소녀 김현미와 아지오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관계를 오래오래 이어가기 위해 우리 사원들이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저는 아지오의 새로운 디자인이 탄생하거나 좋은 소식을 전해들을 때면 그 어떤 기쁨보다 이 기쁨이 큽니다. 제게는 그 의미와 가치가 소중하고 그 편안함이 좋기 때문이지요."▲아지오 구두를 신고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현미 사회복지사~^^오십대 소녀 김현미!   "저는 어릴적 생각이나 지금의 생각이 언제나 같습니다. 몸이 크고 나이가 먹었을 뿐, 생각은 늘 같답니다." 자신을 위해 고민하고 많이 명상하며 스스로를 정중동으로 가꾸어 가는 그를 읽을 수 있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혼자 고생하신 어머니와 사춘기마저 가사를 돌보느라 겪을 시간조차 갖지 못했던 현미씨, 스물셋 젊은 나이에 결혼하여 아이 셋을 키우며 산후 우울증과 내적 갈등으로 뒤늦게 맞이한 현미씨의 사춘기... 39세에 가슴에 담아둔 학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고 오십이 넘은 지금에는 사회복지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김현미로... 그리고 인생 후반전은 남편과 함께 천진스런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기 위해 또 다른 준비를 차곡차곡 해가는 리더 김현미!"저는 상상을 잘하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일도 좋아하며, 자신감을 갖고 걷기를 즐겨하며, 새롭게 시도하는 일을 끊임없이 합니다." 현미씨가 어릴 때 생각과 지금의 생각이 같다고 말하는 것은 가난과 갈등을 미리 경험하며 일찍 철이 들어버린 탓이라 여겨진다. 요동치지 않고 스스로 이기는 법을 익혀서 위기와 문제를 침착하게 풀어 왔기에 지금도 소녀처럼 꿈을 만지며 아이디어를 생성하고 뭔가를 시도하려 한다. 요새는 지역과 국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며 되도록 참여의 기회를 만드는 일에도 시간을 쓴다는 현미씨!"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걸어서 정한 곳을 가기 위해서 신발을 신겠지요. 저는 아지오를 신을 때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곳을 가고자 노력합니다."김현미 사회복지사가 아지오의 존재 의미를 다시 일깨워 준다.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로 소통하고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림으로 소통하듯 관심과 애정을 풍부하게 지녀서 주변과 아름답게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현미씨가 진정한 사회복지사로 다가왔다.▲ 신록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6월의 평창에서초록빛 아름다운 평창에서 소녀 김현미씨와 긍정을 나누어 가져 매우 흐뭇했다. 추구하는 바와 지닌 꿈이 서로 닮았고 사회를 향해 펼치고자하는 뜻이 같아서 더 좋았다. 명품 아지오와 소녀 김현미의 생각이 일치하므로 우리 모두의 내일은 분명 행복이요 성공일 것이다.다소니 화이팅! 김현미 화이팅! 아지오 화이팅!!! 
김현미 / 사회복지사 / 20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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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지오가 찾아갑니다.